모든 빈티지 시계인의 첫사랑 - 폴라우터를 기다리며

어느덧 2026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로운 2026년에는 또 어떤 시계들이 발매되어 저희를 기쁘게 해 줄지 굉장히 기대가 되는데요. 사실 저는 오래 전부터 기다리고 있는 신작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위 사진에서 멋진 포즈를 취하고 있는 유니버설 제네바 폴라우터(Polerouter)의 새로운 복각 버전입니다.

유니버설 제네바는 1894년 르 로끌에서 ‘유니버설 워치’라는 이름으로 설립해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하여, 1919년 사업장을 제네바로 옮기고 1936년에 와서는 유니버설 제네바로 이름을 바꾸게 됩니다. 그 후 1936년 트라이-컴팩스를, 1954년엔 폴라우터를 발매하며 전성기를 상징하는 굵직한 아이콘들을 남겼고, 무브먼트 측면에서도 1955년 마이크로 로터를 장착한 오토매틱 무브먼트인 cal.215를 개발하여 시계사에도 작지 않은 족적을 남겼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cal.215의 개발 시점보다 1년 빠른 1954년에 최초로 마이크로 로터 무브먼트를 개발했던 뷰렌(Buren)사에서 유니버설 제네바를 특허권 침해로 고소했는데, 그 소송에서 유니버설 제네바가 패소하면서 로터 뒷 쪽에 위 사진처럼 ‘Patented Rights Pending(특허권 계류 중)’이라는 낙인을 찍어야 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유니버설 제네바는 1958년에 독자적인 특허를 인정받으며 뷰렌과 함께 마이크로 로터 무브먼트의 강자로 자리잡게 됩니다.
그러나 찬란했던 과거를 이어가지 못하고 몰락했던 대부분의 시계 브랜드가 그렇듯, 유니버설 제네바는 쿼츠 파동에 큰 타격을 입고 90년대에 홍콩의 지주회사인 Stelux에 팔려가게 되면서 그 매력들을 하나 둘씩 잃게 됩니다. 그 후 2010년대 내내 몇 년에 한 번씩은 대형 시계 기업이나 부유한 수집가 그룹이 유니버설 제네바를 인수하여 부활시킬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결국 아무 진전도 없었고 유니버설 제네바는 영원히 문을 닫을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던 지난 2023년, 브라이틀링이 오랜 기간 동안 잠들어있던 유니버설 제네바를 인수하면서 상황이 급격히 변하게 됩니다. 인수로부터 1년 후, 신생 유니버설 제네바는 과거 정식 계약을 맺어 시계를 공급했던 인연이 있는 스칸디나비아 항공(이하 SAS)의 북극항로 비행 70주년을 맞이하여 유니크 피스 폴라우터 트리뷰트 3점을 각각 발표했습니다. 이렇게 깜짝 이벤트로 팬들의 기대감을 한껏 고조시켰던 복각 버전의 폴라우터는 2026년 발매를 목표로 계속 개발 중이라고 합니다.
복각 버전에서도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는 특유의 플루티드 형태로 입체감이 있는 이너 링과 그에 맞춰서 약간 짧은 느낌의 도핀 핸즈, 그리고 그 이너 링을 감싸며 뒷받침해주는 듯 적당한 두께의 베젤과 트위스티드 러그가 매력적인 케이스까지...빈티지 시계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매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멋진 시계인데, 브라이틀링의 CEO인 조지 컨도 신생 유니버설 제네바의 기념비적인 첫 모델로 이 폴라우터의 복각 카드를 뽑은 것을 보면 시계 애호가들의 눈이 모두 비슷하구나 싶은 느낌도 듭니다.

젊은 시절의 제랄드 젠타
이런 멋진 디자인은 바로 그 유명한 제랄드 젠타의 손에서 탄생했습니다. ‘거장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은 천재 디자이너가 쓴 커리어의 제 1장.’이라는 표현이 손색없을 정도로, 23살의 제랄드 젠타는 자신의 첫 데뷔작을 높은 수준의 심미안과 감각으로 완성했습니다. 유명 시계 웹진인 호딩키의 에디터였던 Stephen Pulvirent은 본인이 처음 구매했던 빈티지 시계인 폴라우터의 디자인적 매력에 대해 ‘이 시계들은 복잡했지만 지나치게 복잡하지는 않았습니다.’라고 멋지게 표현했습니다. 저도 굉장히 공감이 가네요. 좋은 시계 디자인에는 항상 ‘절묘한 밸런스’라는 부분이 빠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폴라우터가 시계 팬들 사이에서 ‘최고의 빈티지 입문용 시계’로 뽑히는 이유는 단지 디자인뿐만은 아닙니다. 이 시계는 앞서 언급했던 SAS가 1954년 코펜하겐과 LA를 연결하는 북극항로를 최초로 개설하면서, 극지 비행을 위해서 자기와 온도 변화에 강한 단단하고 실용적인 파일럿 워치를 목표로 제작이 되었습니다. 특히나 앞서 언급했던 이너 링이 큰 역할을 하는데, 글라스에 딱 부착되어 곡선형의 다이얼과 함께 이중으로 시계를 밀봉하는 기능을 했고, 이 기능은 1953년에 외부 요인으로 인한 손상을 방지하는 실용성을 인정받아 특허를 받기도 했습니다. 역시 천재의 디자인은 기능적인 부분도 놓치지 않는군요.
이런 태생적인 이유로 폴라우터는 비교적 튼튼한 만듦새를 가지고 있었고,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다른 ‘우아한’ 빈티지 시계들에 비해서 상태가 좋은 매물과 파츠들이 많이 남아있게 됩니다. 만약 시계가 고장이 난다고 해도 파츠 수급이 가능해 수리할 수 있다라는 점은 폴라우터 팬들에게는 그나마 다행인 부분이네요.

(출처: https://universalgenevepolerouter.com/repairing-a-worn-microtor-from-calibers-215-218-68-69/)

고질적인 문제인 로터의 축 이탈과 그로 인해 케이스백에 남은 원형의 상처
(출처: https://universalgenevepolerouter.com/repairing-a-worn-microtor-from-calibers-215-218-68-69/)
하지만 아무리 튼튼하게 만들어졌다고 해도 폴라우터는 생산된 지 60년이 넘어가는 빈티지 시계입니다. 특히나 폴라우터 팬들 사이에서 악명 높은 마이크로 로터와 연결된 진동추(oscillating weight) 연결부의 마모로 인한 로터 축 뒤틀림과 그로 인한 무브먼트 내부의 오염 및 로터 효율 저하는 빈티지 입문자들에겐 큰 장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결함은 실제로 시계를 열어서 무브먼트를 직접 보지 않거나 로터가 돌아가는 소리를 자세히 듣지 않는다면 절대 알 수 없기 때문에, 온라인 거래가 주를 이루는 요즘의 빈티지 시계 시장에서는 더더욱 주의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물론 현 시점에서 저 부품을 구하는 것이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하지만, 이런 건 빈티지 시계를 오래 다뤄본 ‘찐팬‘들에게나 익숙한 일이지 저와 대부분의 여러분 같이 ‘폴라우터로 빈티지 시계에 입문해보겠어!’라는 야심찬 꿈을 가지고 이베이나 뒤적이는 초보들에게는 언제나 스트레스일 수 밖에 없습니다. 국내의 빈티지 시계 시장이 아직은 성숙화가 되어있지 않다는 점이 뼈저리게 아픈 순간이죠.

(출처: https://universalgenevepolerouter.com/the-polerouter-buyers-guide/)

(출처: https://universalgenevepolerouter.com/the-broad-arrow-polerouters/)
거기에 인기가 많았던 폴라우터답게 무려 1000종(!)이 넘는 폴라우터가 생산되었었고, 그 중에서 이너 링과 트위스티드 러그로 대표되는 ‘일반적인’ 폴라우터만 찾는다고 해도, 그 종류는 무궁무진합니다. ‘브로드 애로우 핸즈’를 가진 폴라우터(희귀한 모델이기에 굉장히 고가입니다.)도 있고, 다이얼도 모두 비슷해 보이지만 12시 쪽의 로고가 초기형 모델과 후기형 모델의 디자인이 다르고, 무브먼트도 초기형은 cal.138 범퍼 무브먼트를 쓰고, 1955년부터는 마이크로 로터를 장착한 cal.215 계열을 사용하는 등 정확한 분류가 정말 굉장히 어렵습니다. 다행히 Adam Hambly라는 폴라우터에 진심인 팬이 만든 사이트에서 현존하는 폴라우터의 레퍼런스들을 정리하여 정보를 제공하고는 있지만, 제보 받은 사진과 다른 폴라우터 팬들의 협력으로 레퍼런스를 정리하고 있는 실정이라, 공신력이 높은 정보들은 아닙니다. 그래서 사이트를 눈이 빠져라 살펴봐도 ‘그래서 내가 보고 있는 매물은 레퍼런스가 뭐야?’하는 경우가 더 많죠.

그런데다가 코로나를 거치면서 많은 사람들이 시계 취미를 가지게 되고, 그 중 일부 팬들의 취향이 점차 깊어지면서 빈티지 시계들을 찾기 시작하며 슬그머니 우상향하고 있던 빈티지 폴라우터의 가격은 브라이틀링이 유니버설 제네바를 인수한 후, CEO인 조지 컨이 ‘우리는 유니버설 제네바를 브라이틀링보다 훨씬 높은 가치를 지닌 브랜드로 포지셔닝할 예정이며, 단순한 3핸즈 스틸 워치의 경우 15,000 스위스프랑부터 시작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한 인터뷰와 함께 상한가를 치기 시작합니다. 더 이상 옛날처럼 ‘가성비 좋게 마이크로 로터를 경험할 수 있는 빈티지 시계’로 접근하기 어려운 가격대가 되어버린 건데요. 이렇게 폴라우터가 돈이 된다는 소식이 널리 퍼지면서 사설에서 리피니싱한 다이얼을 원래 다이얼인 양 장착한다거나, 핸즈를 다른 폴라우터에서 빼서 이식해놓는 식으로 교묘하게 부품이 교체된 시계(일명 프랭큰)들이 시장에 더욱 많이 나오게 됩니다.

(출처: https://universalgenevepolerouter.com/galleries/frankens/)
예시로 몇몇 개체를 살펴보자면, 위처럼 ref.20363에 아예 쓰인 적이 없는 바톤 핸즈를 장착해놓은 프랭큰 시계는 애교 수준이고,

(출처: https://universalgenevepolerouter.com/galleries/frankens/)
위 사진은 ref.20368 혹은 ref.204610 케이스에 한참 뒤에 나왔던 ref.869113 다이얼이 올라가 있네요. 다이얼의 섹터 디테일에서 세로줄은 없고 가로줄만 있는 것이 후반기에 생성된 폴라우터 다이얼의 특징인데, 케이스는 후반기에 쓰인 모양이 아니기 때문에 역시 프랭큰 시계입니다.

(출처: https://universalgenevepolerouter.com/galleries/reprinted-dials/)

(출처: https://universalgenevepolerouter.com/galleries/reprinted-dials/)
이제 보여드릴 개체들은 리프린트된 다이얼들인데 첫 번째 사진은 다이얼에 원래 쓰여있던 글귀를 지우고 덮어서 쓰는 이른바 ‘다이얼 클리닝’ 작업을 했는지 다이얼 표면에 뭔가가 벗겨져있는 듯한 흔적이 남아있고, 두 번째 사진의 다이얼 6시 방향에는 론진에서나 보일 법한 아주 고풍스러운 필기체의 ‘Automatic’ 글귀가 힘차게 쓰여있네요. 역시나 정식 다이얼이 아닌 누군가 임의로 수정해놓은 다이얼 디테일입니다.
위에 보여드린 예시들은 그나마 어설픈 부분들이 있어서 쉽게 프랭큰 여부를 알 수 있다고는 하지만, 결국 이런 디테일까지도 비슷하게 따라 해놓은 개체가 있다면, 60년이라는 세월까지 더해져 있기 때문에 구분이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거기에 예전에 비해 가격도 많이 올라버린 상태라 ‘실수하더라도 한번 사보자!’ 하는 모험정신도 쉽게 들지 않더군요.

2024년 공개한 폴라우터
제가 올해 9월에 발매 예정이라는 폴라우터 복각 모델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는 이유는 이런 이슈들 때문입니다. 앞서 짧게 소개했던 SAS 북극항로 개척 70주년 기념 트리뷰트 모델 이후, 거의 20개월이나 지난 후에 일반판 판매가 시작되는 셈인데, 저는 일반판 폴라우터가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개발되고 있는 이유가 새로운 폴라우터에 쓰일 무브먼트를 개발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실제로 위 사진의 트리뷰트 모델들은 유니버설 제네바의 빈티지 NOS 무브먼트, cal.1-69를 사용했었지만, 앞으로 생산될 수많은 폴라우터에 NOS 무브먼트를 넣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그렇다고 15,000 스위스프랑, 현재 환율로 대략 2,750 만원 정도하는 스테인리스 스틸 재질의 쓰리 핸즈 타임온리 시계에 일반적인 ETA 사나 라쥬페레 사에서 만들어 파는 풀 로터 무브먼트를 넣어버려서 팬들을 기만하는 무리수를 두진 않겠죠? 무조건 폴라우터의, 더 나아가 유니버설 제네바의 시그니쳐라고 할 수 있는 마이크로 로터 오토매틱 무브먼트를 인하우스로 직접 만들거나, 인하우스 생산이 여의치 않더라도 외부에서 적당한 에보슈 무브먼트를 구매해 데코레이션을 해서 넣어줄 것 같습니다.

(출처: https://www.fratellowatches.com/tbt-universal-geneve-polerouter-review/)
제가 앞서 이런저런 불평을 해봤지만 빈티지 폴라우터의 가치는 전설 그 자체인 제랄드 젠타의 디자인과 북극항로의 낭만, 그리고 마이크로 로터의 기술력이 만난 빈티지 시계의 정석이라는 큰 의미들이 건재하는 이상 오랜 기간 동안 지속될 것 같습니다. 다만 올해 발매될 복각 모델은 폴라우터를 너무 사랑하지만, 빈티지 시계는 꺼려지는 시계 팬들에게 또 다른 좋은 선택지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 역시 듭니다. 결국 브라이틀링이 해석해 내놓을 복각 폴라우터의 실물은 어떨지, 어떤 스펙으로 발매될지, 조만간 찾아올 가을을 손 꼽아 기다려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