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 I M E F O R L A B

우리가 몰랐던 일본의 시간 5. 파비앙 펠렛

December 31, 2025
By 쌍제이

FABIAN PELLET

파비앙 펠렛

https://www.fabianpellet.com/

워치메이킹의 성지인 스위스, 그중에서도 여러 워치메이커들을 배출한 발레 드 주를 떠나 가족을 위해 일본에 정착한 스위스인이 있다. 무엇보다 그는 브레게의 그랜드 컴플리케이션 부서 워치메이커, 발레 드 주 기술 학교(École Technique de la Vallée de Joux) 교사라는 탄탄한 커리어를 뒤로 하고 일본에 왔다.

일본으로 넘어와서 독립 시계제작자가 되었다. 그 이유가 궁금하다.

이유는 굉장히 간단하다. 아내가 일본인이기 때문이다. 발레 드 주에서 아내와 살다가, 아들이 태어나면서 아내의 가족 곁으로 가까이 가고 싶단 생각을 했다. 커리어 면으로 보면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하지만 일본으로 이주한 것은 정말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여러 좋은 사람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스위스와 비교했을 때 일본에서 워치메이킹을 하면서 느낀 점이 있나.

공방을 세팅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처음에는 케이스나 다이얼은 물론 워치메이커 벤치를 만드는 곳까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일본의 전압은 100V다. 스위스는 230V라서 내가 가지고 있던 도구들도 제대로 사용할 수 없었다. 좋은 점은 앞서 말했듯 사람들이다. 내가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주변에서 많이 도와줬다. 그리고 일본에 있다는 사실이 브랜드를 론칭할 때 이점으로 작용했다고도 생각한다. 도쿄에 있는 스위스 워치메이커라니, 독특하지 않나.

라운딩머신

일본에 넘어와서도 사용하는 도구들 중 가장 아끼는 도구가 있나.

워치메이커들은 어찌 보면 시계보다도 도구에 더 많은 애정을 준다. 가장 아끼는 것은 증조부가 사용하던 라운딩 머신이다. 이 머신은 르 에센셜 프로토타입과 초기 모델의 기어작업에 사용했었다. 그리고 샤블랭 70 선반도 애지중지하는 도구다. 샤블랭 70은 내 공방의 뼈대 같은 존재다.

파비앙 펠렛 르 에센셜

시계의 이름을 르 에센셜로 지은 이유가 궁금하다.

말 그대로 군더더기 없이 기본이 완벽한 시계를 만들고 싶었다. 그리고 과거 훌륭한 워치메이커들과 그들의 작품에 헌사를 바치며 그 예술을 이어가는 것이 목표다. 예를 들면 각지고 미러 폴리시드 가공한 유격 없는 나사, 프리스프렁 밸런스 휠과 브레게 오버코일 헤어스프링, 나무로 가공한 코트 드 제네브, 과거의 키 와인딩 무브먼트를 연상시키는 다이얼 쪽의 와인딩 메커니즘 등이 있다. 르 에센셜은 전통적인 워치메이킹의 기본기에 충실한 시계다.

르 에센셜의 무브먼트 브릿지 디자인이 알버트 H. 포터의 데탕트 크로노미터 포켓 워치와 닮은 것 같다. 

포터의 포켓 워치에서 일부 디자인적 영감을 받은 것은 맞다. 나는 곡선이 강조되면서 메인플레이트와 기어를 최대한 노출시키는 브릿지를 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디자인 이외의 다른 부분은 내가 직접 계산하고 설계한 것이다. 예시로 르 에센셜에서는 무브먼트를 케이스에 고정하는 케이싱 스크류를 찾아볼 수 없다. 군더더기 없는 시계를 감상하는 데 있어 케이싱 스크류가 방해된다고 생각해 최대한 숨겼다. 그리고 이스케이프먼트 휠 브릿지는 1950년대 르로끌의 크로노미터 무브먼트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당시 제니스 135나 푸조 260 같은 무브먼트를 보면 거대한 밸런스 휠 아래에 아주 작은 이스케이프먼트 휠과 그걸 고정하는 브릿지를 배치한다. 마지막으로 밸런스 휠은 마린 크로노미터의 바이메탈 밸런스 휠에서 영감을 받아 림 중간을 끊어놓았다. 원래는 평범한 모양이었지만, 내 멘토 프랑수아 에라르가 “대량 생산된 밸런스 휠과 크게 다를 것 없어 보인다”라고 언급해서 3개월의 노력 끝에 변경했다.

처음엔 피니싱이 눈에 먼저 들어왔는데, 얘기를 들어보니 설계 면에서 정말 많은 고민을 하고 만든 것이 느껴진다. 그런데 요즘의 트렌드는 피니싱이지 않나. 이 유행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워치메이킹은 여러 분야가 결합된 작업이다. 피니싱도 그중 하나다. 반대로 말하면 피니싱을 잘한다고 해서 완전한 워치메이커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근본적으로 피니싱은 무브먼트의 설계에서부터 쌓아 올린 정성의 마지막 표현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독립 시계제작자’란 타이틀은 설계, 제작, 조정, 피니싱까지 모든 역량을 갖춰야만 한다. 

마지막으로 독립 제작자의 길을 걷게 된 이유가 궁금하다.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과는 또 다른 도전 아닌가.

시계를 만들기 시작한 건 일종의 좌절감 때문이었다. 메이저 브랜드의 프로젝트에 참가할 때마다 설계와 구성 면에서 개선할 여지가 계속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메이저 브랜드에서는 개인이 중간에 개입해 바꾸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리고 ‘나보다 오래 살아남을 물건’을 직접 만든다는 아이디어가 얼마나 매력적인가. 그래서 브랜드의 이름을 내 이름으로 하기로 마음먹었다. 내 시계는 내가 사라지고 나서도 우리 가족들과 고객들의 손목에서 가끔이라도 움직였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