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 I M E F O R L A B

우리가 몰랐던 일본의 시간 1. 하지메 아사오카

December 31, 2025
By 쌍제이

바야흐로 독립 시계제작자의 전성시대다. SNS에서는 매일같이 새로운 시계가 등장하며, 이 때문인지 워치메이킹에 도전하는 이들도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지고 있다. 국내에서도 시계 문화가 몇 년 전보다 성숙해진 덕분인지 이들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시계를 ‘소비’하는 것에서 벗어나 ‘창작’에 도전하고자 하는 이들도 하나둘씩 보이고 있다. 단순한 한국산 시계가 아닌 자신만의 시계를 꿈꾸는 움직임이 태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기점에서 일본의 생태계는 우리에게 가장 현실적인 참고점이 된다. 비록 가장 가까운 국가이지만 그들이 쌓아온 시계 문화의 깊이는 결코 가볍지 않다. 그들은 스위스의 문법을 따르지 않고도 세계 무대에서 자신들의 존재 가치를 스스로 증명해왔다. 과연 그들은 스위스보다 척박한 인프라를 어떻게 극복하고 자신들만의 색을 찾았을까. 일본에서 활동하는 다섯 명의 인물을 직접 만나 그 답을 구했다.

HAJIME ASAOKA

하지메 아사오카

http://www.hajimeasaoka.com/

독립 시계제작자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진 이들 중 하지메 아사오카를 모르는 이는 단언컨대 없다. 일본인 최초의 손목시계용 인하우스 투르비용 제작자, AHCI에 입성한 두 번째 일본인, 그리고 쿠로노 도쿄로 독립 시계제작자의 서브 브랜드 붐을 이끈 것까지 널리 알려져 있다.

몽트르 아 탁

오늘 착용한 시계에 대해 설명해줄 수 있나.

오늘 착용한 시계는 시각 장애인을 위한 시계 몽트르 아 탁(Montre à Tact)이다. 핸즈가 튀어나와 있어 만져보는 것으로 시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잘못 만져서 핸즈가 뒤틀리는 걸 방지하기 위해 핸즈 안쪽에 서스펜션을 넣었다. 그래서 핸즈를 잘못 돌리더라도 손을 잠시 떼고 만지면 원래 시간을 알 수 있다.

산업 디자이너에서 독립 시계제작자의 길을 걷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원래는 광고업이 본업이었는데, 1996년에 잠시 시계 디자인을 한 적이 있다. 그때 디자인한 시계의 반응이 좋아 이후로도 디자인 요청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시계 제작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후 조지 다니엘스의 워치메이킹을 읽으며 독학하던 중 2008년 리먼 사태로 인해 광고 일이 줄어들자 본격적으로 시계 제작에 뛰어들었다. 그 다음 해에 공개한 게 투르비용 #1이다.

독학으로 배웠다니 대단하다. 제품의 구상이나 제작에 있어 영감을 준 사람이 있는가.

보통 이런 질문을 하면 조지 다니엘스와 그의 책이라는 대답을 많이 들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 시계 제작에 있어 도움을 많이 받은 것은 맞지만 영감을 주었다기에는 디자인이 내가 추구하는 방향성과는 많이 달랐다. 오히려 올림푸스 카메라의 요시히사 마이타니라는 디자이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의 에세이를 읽으며 여러 기능을 한 디자인 안에 넣기 위해 어떤 고민이 필요하고 얼마나 노력을 해야하는지를 느꼈다. 정확히는 디자인 자체보다 그의 사상과 철학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요즘 유럽과 일본 양쪽에서 독립 시계제작자가 많이 나오고 있다. 일본의 독립 시계제작자로서 가지는 강점과 약점이 있나.

겸손한 얘기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강점은 없다고 생각한다. 만들면 만들수록 스위스는 정말 모든 것이 월등하다고 느껴진다. 교육부터 공급업체까지 모든 인프라가 갖춰져 있다. 애초에 수백 년에 걸쳐 완성된 환경이고 물량과 자본도 일본이랑은 다르지 않나. 특히 다이얼 도장 기술은 확연히 다른 걸 체감한다. 국가 차원의 지원도 빼놓을 수 없다. 다만 같은 재료여도 프랑스 사람이 요리하면 프랑스 요리같은 느낌이, 이탈리아 사람이 요리하면 이탈리아 요리같은 느낌이 나오듯 시계에 드러나는 일본의 색이 차별점인 것 같다.

한국인의 입장에서 보면 일본은 인프라가 매우 잘 갖춰진 편이라고 느껴져서 답변을 듣고 많이 놀랐다. 어찌 보면 더 척박한 환경에 있는 한국의 워치메이커들에게 조언을 부탁한다.

나는 철도 모형을 좋아하는데 한국에는 철도 모형계에서 유명한 선진정밀이라는 회사가 있다. 일본의 매니아들은 물론 전 세계의 철도 모형 매니아들에게 인정을 받는 회사다. 이것처럼 한국 사람들도 정밀한 것을 만드는 것에 대해 타고난 재주가 있다. 관심만 가진다면 한국에서도 더 많은 워치메이커가 나올 것 같다.

인스타그램에서 재미있는 글을 하나 봤다. 2번 기어 내각의 CNC의 결과물과 핸드 피니싱의 결과물을 비교했던 글인데, 본인은 CNC로 만든 것을 사용할 것이란 내용이었다. 요즘 독립 시계제작자들은 모든 부분을 손으로 피니싱하는 것이 유행이지 않나.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CNC와 핸드 피니싱 모두 사용하지만, 해당 게시물은 강도를 희생하면서까지 억지로 내각을 만들며 핸드 피니싱을 하진 않을 것이란 뜻이었다. 기계공학적으로 내각이 둥근 기어가 각진 기어보다 내구성이 좋다. 요즘의 핸드 피니싱 유행도 크게 동감하진 않는다. 중요한건 설계의 안정성과 디자인이다.

쓰나미 밸런스 휠 스포크가 2개부터 4개까지 버전이 다양한 것도 설계를 최적화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인가?

당연히 밸런스 휠은 크고 가벼울 수록 좋다. 때문에 스포크가 2개인 것이 더 가볍고 공기 저항 면에서도 유리해 에너지 손실을 덜 받는다. 다만 쓰나미의 밸런스 휠 디자인에서 스포크를 4개로 늘리면 무게추를 더 설치할 수 있어 조정 난이도가 낮아진다. 아직까지도 스포크가 2개인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하지만, 2개의 무게추로 오차를 조정하기엔 사실 굉장히 힘들다.

타카노 샤토 누벨 크로노미터

하지메 아사오카 브랜드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성이 궁금하다.

예전에는 시계 애호가들에게 고평가받는 시계를 만들고자 노력했다. 이제는 오늘 착용한 시계처럼 독특한 시도를 하면서 다른 독립 시계제작자들에게 고평가받는 시계를 만들고 싶다. 쿠로노 도쿄는 ‘하지메 아사오카’ 디자인 DNA를 합리적인 가격에 제공한다는 지금의 방향성을 유지할 것이다.

한국에서도 쿠로노 도쿄의 인기가 매우 많다. 그런데 타카노의 인지도는 아직 높지 않다. 타카노를 소개해줄 수 있나.

타카노를 잠깐 소개하자면, 완판되면 단종되는 쿠로노 도쿄와 달리 지속적인 디자인을 목표로 한다. 또한 타카노는 브장송 천문대 크로노미터 인증을 받기 위해 추가적인 노력을 들인다. 쿠로노 도쿄의 상위 브랜드라고 보면 될 것 같다.